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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Jeon Bong-jun (Historic Site, Jeongeup in Jeollabuk-do)_전봉준(전봉준유적지, 전북 정읍) 본문

100 Great Men Who Brightened Korea

83. Jeon Bong-jun (Historic Site, Jeongeup in Jeollabuk-do)_전봉준(전봉준유적지, 전북 정읍)

GBbrake 2020. 3. 24. 00:57

 100명의 위인들 중 한 분인 김옥균 선생이 상해에서 피살되었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게 되며 갑오개혁이 추친되고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1894년은 격동의 조선 말기 중에서도 특히 커다란 소용돌이가 몰아쳤던 한 해였으며 그 중심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다.

 고부(현재 전라북도 정읍)의 군수였던 조병갑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되고 세계사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나비효과의 바람짓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자료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https://gbbrake.tistory.com/211)  

 2019년 방영된 '녹두꽃'이라는 드라마를 보시면 난세를 풍미하던 시대의 영웅들의 드라마틱한 삶에 대해 간접경험해 보실수 있으니 시청해 보실 것을 추천드린다.

전봉준유적지는 전북 정읍에 있으며 서울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유적지 앞에 주차시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지 않지만 대중교통이 불편하니 승용차 이용을 추천드린다.  

 

Address : Joso 1-gil, Ipyeong-myeon, Jeongeup-si, Jeollabuk-do, Republic of Korea

 

 전라북도 이평면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전국 어디에서든 볼 법한 마을 입구가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 보면 아래와 같이 우물이 보인다. 우물은 예로부터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마을 공용시설이었다.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도 주고받고 쉬어가곤 했던, 현재로 말하면 마을 단톡방의 구실을 하던,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 농민들이 거주하였을 것만 같은 전북 정읍의 한 마을. 전봉준 선생 고택은 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농업과 학문을 병행하며 성장한 그는 500년 왕조를 지탱해온 통치이념인 유교질서의 모순과 폐단이 극에 달했던 19세기 말 조선의 모습을 정확히 볼 수 있었던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1894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학농민운동의 도화선은 이곳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각종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으며 기존의 저수지로도 논에 물을 대는데 충분하였음에도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억지로 만들며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관리의 수탈이 극에 달하자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었던 전창혁은 농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조병갑에게 매를 맞고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던 농민들은 더 이상 국가가 자신들을 도와줄 힘도 의지도 없다고 인식하게 되고 1894년 2월 15일 손에 죽창과 농기구를 들고 고부관아로 향하게 되며 그 중심에 전봉준이 있었다.  

 농민군은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관아를 습격, 점령한 후 수탈에 앞장섰던 아전들을 처단하는 한편 불법으로 징수한 곡식들을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를 '1차 동학 농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조병갑은 민란의 사실을 눈치채고 미리 고부를 빠져나가고 후임군수인 박원명이 온건한 정책을 시행하면서 불타올랐던 농민운동의 기세가 일단 누그러지게 되었다. 동학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도 동학이 무력봉기와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에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 이용태가 동학도를 '동비'라 부르면서 역적죄로 혹독하게 탄압하게 되고, 이에 분개한 전봉준 등의 농민군은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4월에 '백산'이라는 지역에서 봉기하게 된다. 농민군의 수는 약 1만에 이르렀으며 이를 '2차 동학 농민운동'이라 한다.

 농민군은 5월에 고부 황토현 전투를 포함하여 수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면서 전라북도의 요충지인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나라에서는 이를 받아들여 인천에 청국군이 상륙하였다. 

 하지만 이는 조선의 결정적인 실책이 되며 이를 계기로 을사조약 및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며 나아가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본은 청국군의 조선파병을 빌미로 조선 출병을 결정하게 되고 그 근거는 1885년에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이었다. 

 조선 정부와 동학 농민군은 한반도가 일본과 청나라의 전쟁터가 되는것을 막기 위해 동학군의 요구조건인 폐정 개혁안에 조선 정부가 동의하면서 6월 11일 전주화약을 체결하였다. 

조속한 철병을 원하는 조선의 요청과는 달리 청일양국의 한반도 주둔군의 숫자는 점점 늘어만 갔다. 

 전주화약에 따라 조선 조정은 교정청을, 지방에는 중요한 재판을 할 때 농민이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집강소가 설치되어 드디어 민초들의 염원대로 조선에 개혁의 바람이 부는 듯 하였으나 우려했던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청국은 전주화약 체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반도 주둔군을 철수 시켰으나 일본은 군사파견에 명분이 없어졌음에도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일본의 조선 주둔군 약 8,000명은 7월 23일 조선의 국왕인 고종이 계시는 경복궁을 점령하였으며, 조선군은 이에 대항하였으나 고종이 직접 조선군에게 무기를 버리라는 지시를 내려 해산하게 된다. 

 일본은 경복궁 점령 후 조선을 장악하고 있던 명성황후의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명목상 떠받드는 김홍집 친일내각을 설립하여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김홍집 내각은 교정청을 폐지하고 그 대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였으며 전주화약이 아닌 '갑오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제국의 위세하에 개혁을 만들어갔다.  또한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군대를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1894년 8월 1일 시작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9월 16일 평양전투에서 승리한 뒤부터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다.

 이때까지 조선의 내정개혁을 위해 싸웠던 동학군은 이제부터는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이를 '3차 동학 농민운동'이라고 부른다.   

 외세가 조선땅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데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정부에 실망한 전봉준, 김개남 등의 농민군 지도자들은 10월 12일 3차 봉기를 결정하게 되나 11월 6일까지 내부 입장 정리 문제로 군대를 움직이지 못하고 시간을 끌게 된다.

 전봉준이 속한 동학 조직은 남접이었는데 이들은 거병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당시 동학 교주였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경우 포교의 자유이외에 개혁을 위한 전쟁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동학 내부의 분열로 인한 1개월의 지연이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게 된다. 

 동학군은 우선 충남 공주를 점령한 후 수원을 지나 한양(서울)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진군했는데 공주에 이미 조선 정부-일본 연합군이 당도하여 전투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동학군은 총 병력 2만이 넘었으며 조선-일본 연합군은 3,500 명 정도로 동학농민군이 숫적으로 훨씬 우세하였으나 연합군은 체계적으로 훈련된 정규군에다 최신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공주를 선점하여 유리한 고지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1894년 12월 10일까지 연이은 패배끝에 전봉준 장군은 결국 직속부대를 제외한 농민군의 해산명령을 내렸고 12월 28일 옛 부하의 밀고로 체포된다. 1894년이 시작하면서 뜨겁게 끓어올랐던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전봉준 장군은 1895년 1월 13일 한성부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옥에 수감되고 4월 24일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극적인 삶을 마감하게 된다. 

 필자는 1894년 전봉준의 행적과 관련하여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흥선대원군이 애국자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는 조선말 수구 보수세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며 그의 개혁은 기존 사회질서의 재창조가 아닌 수정, 보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전봉준은 1890년부터 약 2년간 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에 기거하면서 식객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때 흥선대원군의 사상이 전봉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전봉준이 꿈꾸었던 세상은 전주화약에서 체결된 폐정개혁안 12개조의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방관의 농민에 대한 수탈의 중지, 신분제 폐지, 토지 경작권의 실시, 삼정 개형 등 전근대적인 정치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을 경계하는 내용인데 잘 읽어보면 조선사회의 근간을 흔들수도 있는 내용들이다. 

 이런 급진적인 사상을 마음속에 품고있는 전봉준은 어떤 면에서 흥선대원군과 한 뜻을 품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화약의 조항에 대원군의 섭정을 요구하는 항목도 있었다고 하니 그와 대원군의 관계가 평범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전봉준은 교수형이 집행되기 전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사실여부 추궁을 위한 일본의 집요한 고문에도 끝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원군도 특별 사면 탄원등을 통해 농민군 지도자들을 구제해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일단 정국의 안정을 도모한 뒤 본인이 꿈꾸었던 세상을 펼치려 했던 것인지, 아니면 동학 농민군을 이용해서 대원군과 손을 잡고 조선의 중흥기를 만들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전봉준 장군이 애국자라는 사실이다. 그 끝에 자신의 죽음이 있음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십만 농민들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국가의 개혁을 이루어낸 위대한 지도자이다. 

 부패한 관료들로부터 수탈당하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시작된 것인지, 혹은 수 년전부터 계획해 놓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실행된 치밀한 작전인지 알 수는 없다. 

 

 가난하고 고단한 일상속에 생활을 이어나가면서 본인의 사상을 다듬어나갔던 전봉준이 기거하던 방이다.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기 전 날 밤 촛불만이 희미하게 비추는 이 방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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