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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Hwang Hui (Tomb of Hwang Hui, Paju in Gyeonggi)_황희(황희 묘, 경기 파주) 본문

100 Great Men Who Brightened Korea

37. Hwang Hui (Tomb of Hwang Hui, Paju in Gyeonggi)_황희(황희 묘, 경기 파주)

GBbrake 2020. 3. 4. 10:09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라는 말이 있다. 위로는 한 사람 즉 왕을 모시고 나머지 모든 사람의 위에 있다는 의미로 왕조국가의 재상을 뜻한다. 대한민국의 명재상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이 분 황희 이다. 총 24년간 조선의 가장 높은 벼슬인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세종대왕을 보필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태평성대를 이끌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유능한 정치가이자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분이라 할 수 있겠다. 세종 뒤에 대왕을 붙이지 않으면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로 황희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 수식어가 바로 정승이다.

 황희정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얀 백발의 온화하지만 강직한 청백리이다. 약한자에게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부당함에는 강직하게 맞서는 관료의 롤모델이라고 할까.

 황희는 위인 중에서도 유명한 분인지라 그에 대한 기록들은 참 많다. 역사가들 사이에 그냥 야사로 치부되는 것들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일화가 전해지는데 이들을 읽어 보면 평소에 알고 있던 황희정승과는 다른 것들이 발견된다. 친인척의 부패를 옹호하고 매관매직, 청탁등의 사건들이 황희정승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공식적인 역사자료인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된 것들이라 거짓이라고 할 수 없는 자료들이다. 

 그렇다면 황희는 두 얼굴의 소유자였을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필자는 여러 위인들의 산소를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인품이 산소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고 이번에 황희의 묘소를 통해 선생의 생전모습에 대해 추측해 보기로 했다. 황희 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료실을 참고하도록 하자.(https://gbbrake.tistory.com/20)

   

 

황희선생 묘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위치하며 서울에서 약 1시간정도 걸린다. 대중교통이 불편하고 묘소 앞 주차장이 있으니 승용차 이용을 추천드린다. 

 

Address : Geumseung-ri, Tanhyeon-myeon, Paju-si, Gyeonggi-do, Republic of Korea

 도로에서 황희선생묘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협소하지만 묘소 바로 앞에는 아래와 같이 넓은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5월의 푸른하늘과 한적한 풍경이 어우러진다. 번잡한 도심지는 관심없는 듯 오순도순 모여사는 행복한 대가족이 떠오르는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황희선생 묘소로 가는 길. 저 앞에 신도비가 모셔진 비각이 보인다. 

 왼쪽으로 원모재가 보인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서 묘역의 안내문과 방명록이 비치되어 있으며 묘역을 관리하는 관리사로 보여진다.

 '방촌황선생신도비각'이라고 적혀있다. 좌측은 1505년에 세워졌으며 신숙주가 글을 짓고 안침이 글씨를 쓴 것으로 현재는 세월이 많이 흘러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하여 1945년에 우측의 신도비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황희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영정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앞에 보인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관람을 제한하는 여느 묘역들과 마찬가지로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건물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황희선생 묘소를 참배할 수 있다. 

 드디어 묘소에 도착했다. 높은 벼슬을 지낸 분 답게 여러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조선 초에 조성된 묘소 답게 고려시대의 양식이 곳곳에 보인다. 최영 장군의 묘소에서 언급된 바가 있는데 고려시대에는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사상이 받아들여졌으므로 봉분의 바닥은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황희 묘소도 마찬가지이며 봉분 좌 우측으로 툭 튀어나온 장대석도 고려 양식으로 보시면 되겠다. 또한 봉분의 크기도 일반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그것보다 훨씬 컸다. 

 문인석이 3층 기단의 맨 아래에 있다. 보통 문인석이 무인석보다 봉분 가까이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황희선생 묘소의 2층 기단의 석물은 동자석으로 추정된다. 

 가까이에서 보니 복장이나 칼을 들지 않은 모습 등이 동자석이 틀림없는 것 같다. 동자석은 고인의 사후 시중을 들기 위해 세워진 석물이다. 

 조선 초에 세워진 600년 전의 조각상이며 가공이 어려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탓에 조각 수법이 단순하다.

 생전에 재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묘소에만 세울 수 있다는 장명등이다. 

 묘소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아늑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좌측이 가려져 있는 것이 무언가 비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자리가 안 좋은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드는 위치라고 생각된다. 

 황희가 살았던 시대는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첫 벼슬은 고려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최고 직위인 영의정이 되기까지 황희에게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까. 영원할 것 같던 나라가 망하고 새 나라가 개창되는 것, 고려를 저버리고 새 왕조에 충성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등등 가치관에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 같다. 

 

조선의 개국공신이 아니기 때문에 조정에서 자기 세력도 없이 오로지 능력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황희는 세월이 흐르면서 '믿을건 피붙이 뿐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의 일가친족들에 대한 애착이 깊어지지 않았을까. 실록에 보이는 황희관련 비리, 부패 의혹들 중에는 황희 자신의 행적에 대한 문제 보다는 자식이나 사위 등 친인척 관련 비리를 덮어주다가 발각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황희의 집안은 대대로 국가의 관료를 지냈기 때문에 부유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평소의 성품이나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황희에게 정치적 약점이 될 수 있는 비리를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다만 가족들을 끔찍히 여기는 성정상 가족과 연루된 일에는 평소의 맺고 끊음이 날카로운 그 답지 않게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았을까. 그도 인간인지라 완벽할 수는 없었겠지만 오점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싶다.

 왕조가 바뀌고 모시는 임금이 바뀌어도 이 땅에 살아가는 백성은 바뀌지 않는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황희선생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황희는 당시 일반사람들의 경우 천수를 다 했다고 보는 69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나 90세 까지 장수를 하면서 18년간 정승을 지내게 된다. 한 개인의 장수가 국가발전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적을 만들지 않았던 점이 장수의 비결이 아니었다 싶다. 

 선생의 호인 방촌은 '삽살개가 짖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평생 과로에 시달리면서 정무를 보았으나 마음만은 편안한 고향 마을을 꿈꾸시지 않았을까. 묘소가 자리한 이 마을은 도로 안쪽에 자리잡아 아늑하고 평화로운 전경을 자아낸다.  딱 방촌의 분위기이다.  

 

 선생의 고향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 현재의 개성이며 묘소가 있는 이곳 파주는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 즉 서울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다. 고향(고려, 가족)과 국가(조선)에 대한 황희선생의 마음가짐을 이 묘소의 위치가 가장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파란하늘에 연기처럼 지나가는 하얀 구름은 개성으로 가는지 한양으로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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