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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Hwang Hui (Bangujeong Pavilion, Paju in Gyeonggi)_황희(반구정, 경기 파주) 본문
37. Hwang Hui (Bangujeong Pavilion, Paju in Gyeonggi)_황희(반구정, 경기 파주)
GBbrake 2020. 3. 9. 18:51황희 정승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그래서 '정승'이 고유명사처럼 되어 버린 방촌 황희 선생은 정승의 자리에 20년을 넘게 있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최고의 벼슬을 지낸 이유는 선생이 능력이 출중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유례없이 장수한 것도 한 몫 하였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35세 안팎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90세까지 천수를 누렸던 황희 선생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4세에 우의정에 올라 87세에 영의정으로 은퇴하였다고 하니 모든 것을 달관한 나이에 정치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동 시대의 같은 벼슬아치들에게 황희정승은 신선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주요 요직들을 두루 섭렵한 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일반인은 이미 저승에 있을 나이에 앞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일을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희선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자료실을 참고하도록 하자.(https://gbbrake.tistory.com/20)
반구정은 황희 선생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장소로서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다. 썰물에 갯벌이 드러날 때에는 갈매기들이 이 곳으로 날아드는 것이 장관인 이곳에 반구정을 포함한 황희선생 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황희선생 유적지는 경기도 파주시에 있으며 서울에서 승용차로 약 1시간 걸린다. 대중교통이 없으며 주차장이 잘 마련되어 있으니 승용차 이용을 추천 드린다.
Address : 3, Bangujeong-ro 85beon-gil, Munsan-eup, Paju-si, Gyeonggi-do, Republic of Korea
굴다리를 통과하면 아래와 같이 황희선생 유적지의 주차장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많은 관광객들이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넓은 무료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다.
입장료는 대인 1,000원, 소인(6~18세) 500원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니 방문시 참고하시길 바란다.
유적지 내부의 조경 및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넓은 면적에 조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하게 느껴진다.
곳곳에 식재된 나무들이 멋스럽다.
유적지 내부에 황희선생 영당이 있는데 이곳은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선생의 호를 따라 방촌영당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파주의 다른 유적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중에 모두 불타 없어졌으며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당 옆에는 고직사라는 작은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에 이 유적지를 관리하는 사람이 생활하는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방 안을 포함해 여기저기 짚으로 만든 전통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이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고직사는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서당이나 서원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건물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영당 내부에 황희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당들 중에는 영정을 공개하지 않는 곳들도 있는데 여기는 중앙의 감실문을 활짝 열어놓고 영정을 공개 중이어서 반가웠다.
영정속의 선생은 필자가 상상한 신선 느낌이 아니라 중년의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이었다. 약간 아쉽기도 했으나 생전 선생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었다. 키는 훤칠할 것 같고 갸름한 얼굴에 시원하게 자리잡은 이목구비는 미남형이다. 작고 날카로운 눈은 예리하고 철저함, 굳게 다문 입술에서 신중함을 예상할 수 있었다.
황희영당 옆으로 경모재가 서 있다. 건물 내부에 한국 전통의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황희 선생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가서 관람할 수 있으며 방촌 선생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돌아볼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설명이 한글로만 되어 있어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이 관람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방문할 때는 영문설명이 병기되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경모재를 나와서 돌아보면 황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주변으로는 황희선생이 생전에 남기신 글귀들이 적혀 있으니 가까이에서 관람해 보도록 하자.
세종대왕을 곁에서 보필하며 500년 조선왕조의 기본을 완성시킨 위대한 재상 황희정승. 단정하지만 굳은 힘이 느껴지는 동상이다.
자 이제 유적지의 하이라이트인 정자에 올라볼 시간이다.
우선 원래 반구정이 있던 위치에 지은 '앙지대' 올라본다. 아래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앙지대가 보인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 화창한 날씨의 임진강을 사진에 담을 수는 없었으나 정자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안개가 살짝 낀 강가를 바라보는 것도 청량감이 느껴지고 좋았다.
1915년 반구정을 현재의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앙지대 바로 옆에 나란히 서있는 정자 '반구정'이 보인다. 황희선생이 87세에 관직에서 물러난 후 9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그를 추모하는 유생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이곳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1960년대에 부분적으로 보수하였으며 1998년에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보이는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하게 되었다.
반구정 주변은 황희선생이 활동하던 600년전과 많이 다르겠지만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임진강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넓은 강물은 천천히 흘러가고 물 위에는 황희선생이 내려다보던 하얀 갈매기의 후손들이 여유롭게 떠 있다.
반구정에서 내려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방촌기념관이다.
황희선생유적지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 6월에 지어진 건물로써 내부에는 황희선생의 일대기를 비롯해 그의 삶과 사상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만든 각종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국에 있는 황희 관련 유적을 비롯하여
생전에 쓰시던 벼루 등과 같은 유품들도 있으나
필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황희와 세종대왕간에 있었던 일화 들이다. 황희 묘소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족애가 남달랐던 황희는 친인척의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여러번 곤혹을 치르게 되는데 세종의 황희에 대한 각별함 덕분에 번번이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 대신 세종대왕은 황희의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조선의 태평성대를 만드는 밑거름으로 쓰게된다. 쉽게 말해서 엄청나게 많은 일을 시킨 것이다. 60대부터 황희는 사직서를 올리는데 80대까지 거의 매년 사직 상소문을 올려도 세종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종은 인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놓아주지 않아 거의 사망할 때까지 관직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황희선생은 세종대왕이 가장 총애하는 신하 중 하나였으니 오죽했을까.
황희 선생은 결국 87세에 사직을 허락받고 이곳 파주로 내려와 반구정에서 임진강을 바라보며 3년간 편안히 여생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조선시대 최장수 청백리 정승으로 세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황희선생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두 글자는 '청렴'이다.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에서 청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가 보다.